책 속에서
유럽지중해가 서양의 중요한 역사 공간이었다면, 황해黃海는 동아시아의 역사 현장이었다. 황해는 동쪽과 서쪽, 그리고 북쪽이 중국 대륙과 한반도로 둘러싸였고 동남쪽에 일본이 자리 잡고 있어, 한국·중국·일본 동아시아 삼국의 교류와 교섭의 장場이었기 때문이다. 유럽 지중해가 그렇듯이, 황해는 고대 동아시아의 정치교섭과 문화교류, 그리고 경제교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던 열린 공간이었다. ― 13~14쪽에서 ―
6세기 신라의 중흥과 황해 진출, 7세기 한반도 통일왕조 수립과 신라 수군의 활동, 남북국시대 신라의 번영과 활발한 해양활동 등은 신라의 국가 발전과 해양 진출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음을 말해 준다. 9세기 중엽 장보고張保皐가 황해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해역을 장악하고 해상상업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은 삼국시대부터 꾸준히 진행된 신라의 해양 진출이 그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신라가 바다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겠으나, 무엇보다도 바다로부터 침입하는 해양세력의 도전挑戰에 대한 응전應戰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다. 다시 말하면 건국 초부터 나라의 존망을 위협하던 해양세력을 방어하기 위해 신라는 바다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신라는 해양세력에 성공적으로 대응하였고,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점차 적극적으로 해양 진출을 도모하였다. ― 45~46쪽에서 ―
고구려, 백제, 신라의 한반도 삼국과 중국의 여러 왕조는 황해를 징검다리 삼아 상호 외교사절단을 교환하였고, 일본과 중국의 사절 역시 주로 황해를 통해 동아시아 각 지역을 왕래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대 동아시아의 상인들은 황해를 활동 공간으로 삼아 해상무역에 종사하였고, 각국의 유학생과 구법승들은 황해를 건너다니며 학술과 사상을 서로 교류하였다. 외교사절과 무역상인, 유학생과 구법승들이 평화롭게 오가던 황해는 동아시아의 국제관계가 악화되면 가끔 전쟁의 바다로 변한다. 일찍이 누선장군 양복楊僕이 한나라 수군을 이끌고 산둥반도에서 황해를 건너 고조선을 침공하였고, 수와 당은 수차례에 걸쳐 황해를 넘어 고구려와 백제를 공격하였으며, 발해의 장문휴張文休는 수군을 이끌고 황해를 건너 당나라 등주 일대를 유린하였다. 뿐만 아니라 황해 주변의 국가들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 혼란으로 바다를 통제할 능력이 없을 때, 황해는 해적을 비롯한 불법 집단들이 횡행하며 인명을 살상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폭력의 바다가 되기도 했다. 이런 점에서 황해는 평화와 전쟁, 그리고 폭력이 교차하는 다중多重의 공간이었다고 하겠다. ― 169~170쪽에서 ―
8, 9세기 동아시아 사회의 변모 과정에서 황해에는 다양한 형태의 교역과 교류가 집약적으로 나타났다. 국가 간의 공식 창구를 통한 공무역公貿易은 말할 것도 없고, 개인들 사이에 상품을 거래하는 사무역私貿易, 해적과 같은 집단이 무력을 이용한 불법적인 약탈무역掠奪貿易 등이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가지면서 황해를 무대로 전개되었다. ― 191쪽에서 ―
고구려·백제의 망국 유민과 신라인들은 황해를 징검다리 삼아 당으로 이주했다는 점에서 그들을 일괄 ‘황해 디아스포라’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닐 듯싶다. 황해를 건너 당에 이주한 사람들은 그곳에서 각기 다양한 삶을 살아갔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 당에 강제로 끌려간 고구려인과 백제인들은 물론, 자의적으로 이주한 신라인들은 당의 이민족 지배정책에 따라 각지에 흩어져 거주하다가 점차 중국화되어 갔다. ― 286쪽에서 ―
사절단과 구법승, 유학생을 통한 활발한 대중교섭 결과 신라는 당으로부터 군자君子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선진시대부터 중국인들은 동방에 천성이 유순하고 인자한 사람이 사는 군자국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런데 당대 이전 중국에서는 다소 막연하게 중원의 동쪽에 군자국이 있다고 하였으나, 당 현종 때 이르러 신라를 군자국으로 지목하고 이후 거기에 걸맞게 대우하였다. 이는 신라가 황해교섭을 통해 정치안정과 경제발전, 그리고 문화번영을 이룬 결과이다.― 378쪽에서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