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으로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에 보이는 외래적 요소
개태사가 창건되던 고려 초는 불상의 재료 면에서 철불이 유행하던 시기였다. 이를 입증하듯이 고려의 주요 지배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중부지역에는 고려초기에 주조된 것으로 생각되는 많은 철불이 전해오고 있다. 그러나 개태사에는 당시 유행하던 철불좌상이 아닌 석불입상이 주존불로 봉안되었다. 이것은 당시 유행하던 풍수지리나 비보사상裨補思想과도 연관이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개태사를 창건하면서 이른바 창건주인 태조나 그 측근세력들이 개태사 불상을 통해서 백성들에게 어떠한 의미와 상징을 전하고자 했는가, 다시 말해 조각가들에게 그들이 제작한 불상에서 어떤 이미지가 나타나도록 요구하였을까 하는 문제와도 연관지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개태사가 창건되던 무렵 왕건과의 연계 아래 창건 혹은 중창된 사찰 가운데 문헌기록과 불상이 함께 전하는 사찰은 대체로 운문사雲門寺, 직지사直指寺, 삼화사三和寺를 꼽을 수 있다. 운문사는 앞서 이야기한 바와 같이 보양寶壤의 조언을 받아 전쟁에 승리한 왕건이 경제적으로 지원하여 지은 사찰이며, 김천 직지사는 「직지사사적直指寺事蹟」에 능여能如가 태조의 도움을 받아 중창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삼화사 역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실린 「석식영암기釋息影菴記」에 태조가 통일하고 나서 이 절을 크게 중창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현재 이 세 사찰에 전해오는 불상들(운문사 석불좌상(도 1-16), 삼화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도 1-17), 직지사 석조약사불좌상(도 1-18))은 고려의 후삼국 통일 직후 무렵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데, 불신이 아담하고 얼굴이 여성적이며 인간적인 모습의 불상들로서 동화사 비로암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1-15)이나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도 3-15)과 같은 신라하대 9세기 불상의 양식전통을 이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이 상들에서 보이는 단아하고 온화한 부처의 이미지로는 통일 고려의 강력함을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따라서 그보다는 웅대하고 강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불상의 이미지가 요구되었을 것이며, 결국 나말여초기에 활동하던 여러 조각장인 집단의 다양한 불상 유형 가운데 예천 동본리 석불입상(도 1-10)이나 봉화 천성사 석불입상(도 1-11) 같은 거대한 규모의 석불로 결정되었을 것이다.
또한 거대한 규모의 석조삼존불상으로 조성하면서 개태사 삼존불의 본존상을 좌상이 아닌 입상으로 제작한 것은 입상이 부처님의 유행상遊行像으로서 보다 적극적인 중생구제의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으로 해석할 수 있다.
─‘제1장 개태사 석조삼존불입상과 후삼국 통일’ 중에서, 44~45쪽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
부석사 금동관음보살좌상(도 11-1)은 충청남도 서산군 부석면 부석사浮石寺에서 조성된 상으로 복장 조사에서 주성기鑄成記가 발견되어 천력天曆 3년(1330)에 만들어진 것이 밝혀졌다.
부석사는 의상義湘스님이 통일신라 초에 창건한 신라화엄의 근본도량인 영주榮州 부석사와 동일한 이름의 사찰이다. 고려시대에 들어와서 수도 개경에서 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오면 어렵지 않게 연결될 수 있는 서산 지역에 앞에서 살펴본 개심사 목조아미타불좌상이나 문수사 금동아미타불좌상에서 볼 수 있듯이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으며 그중에 영주 부석사와 같은 이름의 부석사도 세워진 것이다. 현재부석사에는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문화재의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이 금동관음보살상을 통해서만 고려시대의 면모를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보살상의 복장에서 발견된 지본묵서紙本墨書의 조성발원문(도 11-2)에는 고려의 서주瑞州(서산) 부석사에서 당堂의 주존主尊인 관음상 한 구를 주조함으로써 현세에서는 재화災禍를 없애고 복록을 누리며 내세에는 아미타정토에 함께 태어나기를 바라는 계진戒眞을 비롯한 30여 승속인僧俗人들의 간절한 발원이 담겨 있다. 이 발원문 외에도 복장 속에는 종자만다라種子曼茶羅(분실), 옥제품玉製品, 동령銅鈴, 수정水晶 등의 여러 복장물이 들어 있었고, 특히 인간의 오장육부를 표현한 오색의 천과 곡물들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보살상은 대좌와 광배를 잃었고 보관과 지물持物도 없으나 상 자체의 보존 상태는 양호하다. 체구는 풍만한 편으로 몸에 비해 머리가 크며, 방형의 얼굴은 예배상으로서 위엄 있는 모습이라기보다는 아름답고 차분한 여성적인 표정을 짓고 있다. 세부표현을 살펴보면, 높이 솟은 보계는 끝이 다섯 갈래로 나뉘어진상태로 같이 묶여 있으며 앞머리는 중앙을 중심으로 가지런히 대칭되게 새겼다. 얼굴의 각 부분도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표정이 단아하고 양어깨 위에는 수발垂髮이 흐르고 있다. 손은 엄지와 중지를 맞대어 설법인을 결하였고 영락은 가슴뿐 아니라 무릎에까지 화려하게 걸쳐졌다. 착의법을 보면, 마치 여래상의 대의大衣 같은 윗옷을 입었고 왼쪽 가슴에는 내의 치레장식이 있으며 허리에는 군의裙衣를 묶은 띠 매듭이 있다.
이 부석사 상과 형식이나 양식 면에서 가장 유사하다고 할 수 있는 유형의 예로는 국립전주박물관의 금동보살좌상(도 11-3)을 들 수 있다. 이 상은 모든 점에서 부석사 상과 일치하나 상투(보계)와 앞머리, 얼굴 등의 각 부분 조각에 조금 더 깊이가 느껴지고 체구도 균형이 잡혀 있는 편이다. 반면에 승각기 치레장식은 내부에 무늬가 새겨지지 않고 장식술도 달리지 않은 모습이어서 부석사 상보다 조성시기가 늦은 것으로 생각된다. 이 보살상들에서 보이는 화려한 목걸이와 영락, 얼굴과 몸에 살이 많은 풍만한 표현은 부석사 상과 같은 해에 그려진 교토京都 호온지法恩寺 소장〈아미타삼존도阿彌陀三尊圖〉(1330년)(도11-7)의 보살상들과 같은 14세기 전반 불화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어, 조각과 회화라는 차이는 있으나 당시 유행하던 보살상의 이미지를 이해할 수 있다.
부석사 상보다 양식적으로 앞서는 현존하는 14세기 상으로는 앞에서 살펴본 민천사旻天寺 금동아미타불좌상(도 10-2)이 있다. 이 상은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충선왕 5년(1313)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민천사 상의 왼편 가슴에 조각된 눈에 띄게 커다란 내의 치레장식은 부석사 상의 다소 정형화된 내의장식보다 이른 표현이다. 민천사 상에서처럼 이목구비가 얼굴 중앙에 몰려 있는 살찐 방형의 얼굴과 둥근 육계는 도쿄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의 대덕 10년명〈아미타여래도〉(1306년)(도 10-9)에도 나타나는데, 이와 같이 풍만해진 방형의 얼굴이 점차 정형화되면서 부석사 상이나 국립중앙박물관 금동 관음・대세지 보살입상으로 이행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제11장 중생구원의 이미지:14세기의 금동보살상’ 중에서, 362~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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